아테네는 싸우는 여신의 전형이다. 70년대의 아이들은 번개 아톰과 철인 28호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항상 궁금했다. 요즘 아이들은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할 것이다. 호메로스 공연의 청중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테네와 군신 아레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런 호기심에 떡 한 덩이 던져주듯, 시인은 ‘일리아스’ 안에 신들의 이성 대결 장면을 끼워 넣었다. 그런데 승패가 너무 쉽게 갈려서 싱거울 정도다. 아테네의 손에는 “제우스의 천둥도 제압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방패가 들려 있다. 아레스가 긴 창으로 이 방패를 찌른다. 하지만 여신은 사뿐히 물러나 공격을 피한 뒤 벌판에 놓인 검은 돌덩이를 억센 손으로 집어 들고 아레스의 목을 내리쳐 사지의 기운을 풀어 버린다. “어리석은 자여! 나와 힘을 겨루려 하다니, 내가 그대보다 얼마나 더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는지 아직도 몰랐더란 말인가!” 여신이 깔깔 웃는다.
여신들에 대한 호메로스의 상상은 전복적이다. 이 상상은 자연법칙처럼 통용되는 성별 분업의 관념을 뒤엎기 때문이다. 2800년 전의 시인은 급진적 여성주의자였나? 거침없는 여신들의 모습은 억눌려 살던 여인들에게 상상 속 대리 만족이었을까? 당시의 여인들이 품었던 해방의 꿈이 여신들에 대한 상상으로 형상화된 것일까? 아니면 선사시대 모계제 사회의 희미한 기억이 서사적 상상으로 재현되었을까? 모든 해석이 가능하다. 상상 속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뒤섞이기 마련이니까.
상상에는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다. 여신들에 대한 상상도 그렇다. 플라톤은 그런 상상을 실현하려 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국가’에서 여성들을 호메로스의 여신들과 같이 만들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성별과 무관하게 전사나 통치자가 될 수 있다. 성별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이 달라야 한다는 주장은 ‘대머리가 구두장이가 되면, 장발은 구두장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다. “그러므로 여자와 남자를 가릴 것 없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관해서는 그 성향이 같다.” 그래서 수호자 계급의 여인들에게는 옷감 짜기, 아이 돌보기, 하녀 관리와 같은 집안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다. 여인들이 떠난 자리는 누가 채울까? 특히 출산과 양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플라톤은 해결책으로 ‘처자공유제’를 내놓았다. 일종의 군혼(群婚)과 집단양육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여인들을 여신같이 만들 수 있는 조건이었다.
플라톤의 경우는 천상의 상상을 지상에 구현하려고 할 때 생기는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몸을 가진 존재에게 출산과 육아의 구속과 공적 활동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이 딜레마의 한쪽 뿔에 매달린다. 여성들에게 공적 활동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 같지만, 그에 뒤따르는 출산과 양육의 문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경제성장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의 관심은 ‘산업예비군’의 숫자 늘리기에 쏠려 있지 않은가. 딜레마의 해결이 이렇듯 개인의 몫이 되면 여성들은 실존적 트릴레마에 마주할 수밖에 없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서 다른 활동을 포기할까, 집 안팎의 일을 떠맡는 슈퍼 우먼이 되어야 할까, 불확실한 미래일지언정 내일을 위해 오늘의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까? 이런 상황이 낳는 결과는 뻔하다. 치솟는 비혼율, 곤두박질하는 출산율, 일자리를 둘러싼 성별 갈등이 달리 무엇을 말하는가?
해결책은 없을까? 탈레반처럼 여성들을 다시 집안에 묶어둘까, 플라톤의 구상대로 가족을 해체할까, 아니면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출산과 양육의 ‘구속’에서 인간을 구해 줄 기술의 구세주를 기다려야 할까? 어느 것도 합리적 대안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하나다. 성별의 차이 없이 누구나 집 안팎의 일을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현실과 상상의 거리, 지상의 여인들과 올림포스 여신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참고문헌>
1. 조대호, "남신과 동등한 자유로운 여신…성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게 하다”, 동아일보, 2021.11.19일자. A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