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철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를 강타한 ‘한류(韓流)’가 20년이 지난 이제는 ‘전지구적 한류(Global Korean waves)’로 바뀌었다. 그러자 이른 바 ‘중국’은 지난 ‘사드(THAAD)’ 배치를 계기로 ‘한한령(限韓令)’을 내리고 단체 한국여행 금지, 한국산 제품 불매, ‘한류(韓流)’ 금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중공인민의 반한감정을 키워왔다.
최근에는 “한복(韓服)은 명(明)나라 시대 한푸(漢服)에서 온 것이다”, “김치(한식포채, 韓式泡菜, 조선포채, 朝鲜泡菜)는 중국의 것이다”는 우스운 문화적 이슈조차 제기하여 한국인은 물론, 국제적 망신까지 겪고 있다.
약 19년 전인 2001년 중공은 이른 바 “동북역사공정”으로 삼조선, 고구려 역사가 이른 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여 약 7년간 양국이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논쟁이 지속된 바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에서 이른 바 고대 ‘중국(中國)’으로 전달된 역사적 ‘한류(韓流)’는 어떤 것이 있는지 한 번 돌아보자.
바로 춤과 노래와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음악이든 춤이든, 국가 간 예술의 교류는 두 나라 사이에 국교가 수립된 이후 비로소 시작되며, 특히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교류가 활발하게 된다. 예컨대 《수서(隋書)》 “음악하(音樂下)”를 보면 지나 대륙에서 “고려(高麗) 음악은 후위(後魏, 386~534년)가 자국과 고구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나라로, 고구려 출신인 고운(高雲, ? ~ 409년, 북연의 초대 황제)이 수립한 북연(北燕)의 풍씨(馮氏)를 없앤 뒤 (436년) 그 고구려 기(伎)를 얻었다” 고 한다. 그 외 “소륵(疏勒, 동투르키스탄 카쉬가르), 안국(安國,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기(伎)는 서역(西域)과 통한 이래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음악과 춤이 지나 땅의 왕조들에 언제, 어떻게 알려졌는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보자. 고대적 한류로 음악과 대사 춤이 곁들인 예술인 고려기악(高麗伎樂), 간단히 고려기(高麗伎)가 지나 땅에 전달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의 “음악2(音樂二)”가 있다. 이에 따르면 멀리는 남북조(南北朝, 386~586년) 시대 남조의 송(宋, 420~479년) 나라 시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 북위(北魏)와 남조(南朝) 송(宋)나라 지도
수(隋)나라 궁정의 공식 악장 ‘7부기(七部伎)’와 ‘9부기(九部伎)’에 든 고구려 음악과 춤 고려기악(高麗伎樂)
“송(宋) 시대에 고려기악(高麗伎樂)과 백제기악(百濟伎樂)이 있었다. (북)위(魏)나라 탁발(拓跋)때에 이를 얻었으나 다 갖추지 못했다. (북)주(周)나라 군대가 제(齊)나라를 없애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二國)가 그 음악(其樂)을 바쳤다. 수(隋)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없애고,청악(清樂)과 문강예필곡(文康禮畢曲)을 얻어, 9부기(九部伎)에 고려기악(高麗伎樂)은 넣었으나 백제기(百濟伎)는 얻지 못했다” 한다.
고구려는 6세기말 북주(北周) 궁정에서 노래와 춤을 펼쳐 북주황제를 축하하였다. 북주는 고구려 낙랑 왕씨(樂浪 王氏) 어머니의 아들이었던 선비족 우문태(宇文泰)가 세운 나라이다. 그 이래 300년간 수(隋), 당(唐) 등 지나 왕조는 매년 또는 수시로 고구려악무를 궁중음악으로 연주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을 때 항상 연주하였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한 뒤 고구려악은 ‘7부악(七部樂)’과 ‘9부악 (九部樂)’의 하나가 되었고, 당나라 때에는 10부악(十部樂)’의 하나였다. 고구려악무는 대개 탄발악기와 노래하며 춤추는 가무(群舞)가 주를 이루는데, 긴 소매를 흔드는 것이 그 선명한 특징이었다.
이와 관련, 《수서(隋書)》의 “음악하(音樂下)”는 수나라(581~619년)가 세워진지 직후인 그 “처음에 개황(開皇, 581~600) 때에 영(令)으로 정해 ‘7부악(七部樂)’을 두었는데, 하나는 ‘국기(國伎)’,둘은 ‘청상기(清商伎)’,셋은 ‘고려기(高麗伎)’,넷은 ‘천축기(天竺伎, 인도)’,다섯은 ‘안국기(安國伎, Buhara)’,여섯은 ‘구자기(龜茲伎, Kucha)’,일곱은 진(晉)나라 가면기(假面伎) ‘문강기(文康伎)’였다”고 한다.
▲ 오늘날 동투르케스탄 땅 투르판 서쪽의 쿠차와 카시가르
수나라 음악 두 장르 바로 뒤에 고구려 것을 넣고, 그 뒤에 오늘날의 인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동투르키스탄(신강) 위구르족 지역 쿠차 음악을 넣어 고구려 음악이 4개 외국 음악 중 맨 먼저 연주되고 있었다.
수(隋)나라는 지나의 남북조시대 난립했던 여러 왕조를 통일하였다. 그 뒤 문제(文帝)는 개황(開皇, 581∼600년) 때 이웃 나라의 음악인들을 불러모아 궁중에 상주시키면서 음악활동을 전개시켰다. 이것이 칠부악(七部樂)이다.
수나라 때 백제음악과 신라음악
한편 백제기(百濟伎)와 신라기(新羅伎)는 수나라 조정의 공식적 프로그램인 ‘칠부악(七部樂)’에 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5개국 즉 소륵(疏勒, Kashgar), 부남(扶南, Phnam, 캄보디아), 강국(康國, Samarkand), 돌궐(突厥, Turk), 왜국기(倭國伎) 등 다른 나라의 음악과 함께 섞여 때때로 연주되었다.
수나라 대업중(大業中: 605~618년, 611년경)에 양제(煬帝)는 칠부악(七部樂)에 두가지를 보태 9부(九部)를 만들었다. 청악(清樂), 서량(西涼, 돈황, 감숙지역), 구자(龜茲), 천축(天竺, 인도), 강국(康國), 소륵(疏勒), 안국(安國), 고려(高麗) 음악, 그리고 예필(禮畢)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수서》, 하>는 “나중에 (9부악은) 차차 번성하여 그 소리를 모아 태악(太樂)과는 별도로 했다. … 고려(高麗) 가곡(歌曲)에는 <지서(芝棲)>가 있고, 무곡(舞曲)은 <가지서(歌芝棲)>가 있다. 악기로는 탄쟁(彈箏), 와공후(臥箜篌), 수공후(豎箜篌), 비파(琵琶), 오현(五弦), 적(笛), 생(笙), 소(簫), 소피리(小篳篥), 도피피리(桃皮篳篥), 요고(腰鼓), 제고(齊鼓), 담고(擔鼓), 패(貝) 등 14종이 1부(一部)이다. 악공(工)은 18명이다”고 한다.
▲ 거문고류의 쟁(箏)
▲ 당나라 묘벽 그림속 공후(箜篌)
19세기 비파(琵琶)와 거문고(玄琴, 玄鹤琴)
생(笙) 적(笛)
▲ 소피리(小篳篥)와 무용총 고구려 완함 연주자
수나라 때 9부악(九部樂)의 하나였던 고려기는 그 뒤 당나라 태종(太宗)의 정관(貞觀, 627∼649) 때 보강된 10부기(十部伎)의 하나가 되었다.
수나라 당시 백제악과 신라악은 중앙아시아의 소륵(疎勒)이나 강국(康國), 왜국(倭國)의 음악처럼 잡기(雜伎)의 하나로 분류되었다. 백제악은 고려기처럼 공식적인 7부기(七部伎)나 9부기(九部伎)에 끼지는 못했지만, 당나라 궁중에서 오래도록 연주되었다.
고려기(高麗伎) 절목 중에는 “호선무(胡旋舞)가 있어, 춤추는 이는 공위(球上)에 서서 바람처럼 돌았다(旋轉如風)”고 한다. 이는 수, 당 대 지나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제22굴 속 호선무 벽화 그림
고구려 호선무(胡旋舞)를 본 당시 지나인들의 감명은 어떠했을까? 고구려 호선무와 비슷한 강거(康居)의 호선무(胡旋舞)를 본 성당(盛唐) 시인 잠삼(岑參, 715~770)은 자기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꽃 같아라, 춤추며 북으로 도니, 세상 사람들 눈이 있으나 볼 틈이 없네。
높은 집 땅 가득히 붉은 카펫(紅氍毹), 한 곡 시험 삼아 춤추니 천하가 없네.
이 곡은 호인(胡人)이 한(漢)으로 전해왔나니 모든 손님이 보고 놀라 찬탄하누나!
如蓮花,舞北旋,世人有眼應未見。
高堂滿地紅氍毹,試舞一曲天下無。
此曲胡人傳入漢,諸客見之驚且嘆
그 뒤 중당(中唐)의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호인 계집이 추는 호선무(胡旋舞)를 보고 다음의 시를 지었다.
호선녀(胡旋女),호선녀, 마음은 현(絃)에 울리고, 손은 북(鼓)에 응하네。
현(絃)과 북(鼓) 한 번 소리 내니(一聲) 두 소매가 솟누나(雙袖舉),
눈 나리듯 사뿐히 날아(迴雪飄颻) 쑥 되듯이 춤추네(轉蓬舞)。…
곡(曲)이 마치자 부 번 절하여 천자(天子)에게 사하니(再拜謝),
천자가 살며시 이빨을 열어 웃노라(微啟齒).
호선녀(胡旋女)는 강거(康居)를 나섰으니,
헛되이 동으로 와서 만여리라(徒勞東來萬里餘)。
胡旋女,胡旋女。心應絃,手應鼓。
絃鼓一聲雙袖舉,迴雪飄颻轉蓬舞。
左旋右轉不知疲,千匝萬周無已時。
人間物類無可比,奔車輪緩旋風遲。
曲終再拜謝天子,天子為之微啟齒。
백거이의 시벗인 원진(元稹)도 〈호선녀(胡旋女)〉 한 수를 지었다.
천보(天寶) 세월도 끝나려는데 호(胡)가 어지럽히려 하니,
호인(胡人)이 계집을 바쳐 호선(胡旋)에 능하네.
돌고 돌아서 명황(明皇, 당 현종)은 자기도 모르게 홀려버렸네,
요사스런 호(妖胡)야, 어찌 장생전(長生殿)에 이르렀는고.
호선(胡旋)의 뜻은 세상이 모르되, 호선의 얼굴(容)은 내가 능히 전하리니.
天寶欲末胡欲亂,胡人獻女能胡旋。
旋得明皇不覺迷,妖胡奄到長生殿。
胡旋之義世莫知,胡旋之容我能傳。
이 시들은 당나라인들이 고구려 호선무와 유사한 강국 호선무를 본 충격과 감응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고구려 호선무를 보았을 때도 비슷한 감상을 가졌을 것이다. 한편 지나 무용학자 왕극분은 고구려 <호선무>는 강국(康國)의 영향을 받은 춤이라고 하였다. 강국기(康國伎)에도 호선(胡璇)을 행하는 춤이 있었고, 백거이(白居易)와 원진(元稹)이 묘사한 강국의 <호선녀>시(詩)가 유명한 것을 기초로 한다. 다만 왕극분은 강국의 <호선녀> 춤은 `공위에서 춤추지 않고 작은 양탄자에서 빙글빙글 도는 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무용학자 이종숙은 당나라 연회 기예(技藝)의 한 종류로 정착된 것은 [고구려기] <호선무>임을 “고구려 호선무의 정체성 연구”에서 논증했다. 고구려의 <호선무>는 수, 당대보다 앞서 일찍이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중국에 전해졌다. 강국(康國)의 <호선녀>는 호인(胡人)이 당나라 현종(玄宗) 때 도는 춤(旋舞)에 뛰어난 여자 기예인을 헌정한 것인데, 이것이 본래 당나라에 먼저 있었던 고구려기 <호선무>와 유사하게 도는 행위[旋轉]가 많은 춤이어서 그녀를 묘사하는 말로 <호선녀>라고 명명하였고, 그 말이 정착되었다고 보았다. 고구려 호선무와는 다른 점이 있다.
-2편에 계속-